영남루(嶺南樓)는 수려한 자연경관과 웅장한 규모, 그리고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춘정 변계량(春亭 卞季良), 고승 사명대사(四溟大師),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 사람들을 시문으로 굴복시킨 청천 신유한(靑泉 申維翰) 등을 배출한 밀양지역의 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역대로 문학 창작의 자산이 되었다. 따라서 영남루는 휴식이나 제영(題詠)의 장소로 쓰이다가 부사가 관리하는 객사(客舍)의 일부로 되어 자연스럽게 사신과 관리들이 공적으로 묵고 가는 공간으로 자리 잡아 당대의 유명한 학자나 문인들, 그리고 관찰사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수령들이 거의 필수적으로 등림(登臨)하여 시문을 남겼다. 특히 이들 문인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시문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기존의 시를 차운한 것도 많지만 독자적으로 운자를 내어 지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