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禁堂楊先生墓碑銘并序
公姓楊氏諱道南字則明號無禁堂 高麗有諱起以中朝金紫光祿大夫 陪公主東來仍以居之至 諱根封
密城君子孫因以密為貫焉 曾祖諱孝立 祖諱許國號拙軒 考諱咺號漁村 妣善山金氏司宰監副正在鎔之女也 以萬曆甲子二月二日生公 公姿禀超邁穎悟出倫 自幼孝性純篤先意順志 務悦親心滫瀡之供必親在視定省之禮罔敢小懈 年二十七丁先公憂 葬于十里外 逐日往省雖祈寒盛暑未嘗一日或廢村民感其孝相與修治道路曰此孝子省楸路也 不可任其傾仄 每當忌日前期齋沐 蘋藻之物極致精潔將事之席躬自奠獻終月而不叅宴會 貧族或有嫁娶失時者必捐財施 子不計遠近子姪輩或論人品長短 政治得失厲聲之曰論人非自治之道官政非儒生之事 何不思自治而好說分外乎 終日端坐儼然如 有所思及至接 人和氣藹然聞人之惡若將浼焉而 謹於交際只觀其人之賢否不問地閥之高下人有 疑問必剖折明辨竭盡無餘使廳者 洞然築精舍於洛浦扁之曰無禁 盖因地名取取無禁之意也 壁上大書守死善導四字以爲觀省 此先公病革時口不能言于書而示者也 座右又書崇貞年號以寓不忘之義 夢中作詩曰有人贈寶刀秋蓮可三尺欲斬可汗頭龍光空閃 爍苟非偉忠卓節素所蓄積何能有發於夢寢之間哉 臨終亦以口訣授子孫曰志宜立氣宜和言宜慎動宜重 此其平日用工之方也 庚辰三月三日考終于寢 享年七十七是年葬于靈山縣狸谷卯向之原從先兆也 配碧珍李氏樂窮堂汝樟之女 有淑德閨範墓本縣時南山巳向之原 生四男一女男命溥命漸命濬命游女適成南奎 命溥生期萬期百期億 命漸生期遠期大 命濬生期達 命游生期一期亨期輔期壽 外孫大亨大臨大護 曾玄以下不盡錄
銘曰 漁村之子 拙軒之孫 可學之傳 典刑之存 衣履之藏 可以嗣而 護而尊
通政大夫前行敦寧府都正 清州 鄭來錫 謹撰
※수수지공(滫瀡之供) : 부모에게 음식을 부드럽게 하여 정성으로 대접한다는 뜻.
無禁堂楊先生墓碑銘并序
무금당 양 선생 묘비명 병서
公姓楊氏諱道南字則明號無禁堂
공의 성은 양씨이며 휘는 도남이고 자는 즉명이요 호는 무금당이다。
高麗有諱起以中朝金紫光祿大夫 陪公主東來仍以居之至
고려 때 휘 기가 중국에서 금자광록대부이신데 공주를 배행하여 우리나라에 나오시어 영주 하셨다.
諱根封密城君子孫因以密為貫焉
휘 근이 밀성군을 봉하게 되어 자손들이 그로 인하여 밀성으로 향관을 쓰고 있다.
曾祖諱孝立祖諱許國號拙軒 考諱咺號漁村
증조부의 휘는 효립이고 조부의 휘는 허국이며 호는 졸헌이고 아버지의 휘는 훤이며 호는 어촌이다.
妣善山金氏司宰監副正在鎔之女也
비는 선산 김 씨인데 사재감 부정 재용의 딸이다.
以萬曆甲子二月二日生公 公姿禀超邁穎悟出倫自幼孝性純篤先意順志 務悦親心滫瀡之供必親在視定省之禮罔敢小懈
공은 인조갑자(1624)년 이 월 이일에 태어났으며 인품이 준수함은 물론 재질이 총명하고 뛰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순실하여 뜻을 받들어 마음을 기쁘게 하는데 힘썼을 뿐 아니라 음식을 봉양하는 데도 반드시 몸소 간을 봤고 잠자리를 보살핌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年二十七丁先公憂葬于十里外 逐日往省雖祈寒盛暑未嘗一日或廢村民感其孝相與修治道路曰此孝子省楸路也不可任其傾仄
이십칠 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십리 밖에 장례 했는데 비록 아무리 춥고 더워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성묘를 하여 고을 사람들이 감탄하여 효자의 성묘길이라 서로 어울려 길을 고쳐 주었다.
每當忌日前期齋沐 蘋藻之物極致精潔將事之席躬自奠獻終而不叅宴會
매양 기일을 당하면 미리 목욕재계하고 제수를 지극히 정결히 하여 손수 전헌 하였으며 제사 달에는 연회에 참석치 않았다.
貧族或有嫁娶失時者必捐財施子
가난한 일가가 있어 혹 시집가고 장가드는 데 혼기를 놓치게 되면 반드시 도와주었다.
不計遠近子姪輩或論人品長短 政治得失厲聲之曰論人非自治之道官政非儒生之事
원근을 가리지 않고 자질(子姪)들이 남의 장단점과 정치의 득실을 논하면 크게 꾸짖고 사람의 잘못을 논 하는 것은 자신을 다스리는 길이 아니며 벼슬이나 정치는 선비의 일이 아니라고 했다.
何不思自治而好說分外乎
어찌 스스로의 수신을 생각지 않고 분수 밖의 것을 떠드는 가 했다.
終日端坐儼然如 有所思及至接 人和氣藹然聞人之惡若將浼焉而
언제나 엄연히 단정하게 앉아 생각을 가다듬고 있다가도 사람을 접대할 때는 화기애애하였으며 착한 사람 말을 들으면 반가이 차양하고 악한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 내 몸이 더러워지는 것 같이 했다.
謹於交際只觀其人之賢否不問地閥之高下 人有疑問必剖折明辨竭盡無餘使廳者
사람을 사귈 때는 오로지 착한 것을 보고 지체나 문벌의 고하를 관계치 않았다. 사람들이 의심 나는 것을 물으면 반드시 그것을 캐물어 분석하여 밝게 판별하여 주어 듣는 자로 하여금 시원하게 설명하였다.
洞然築精舍於洛浦扁之曰無禁 盖因地名取取無禁之意也
정사를 낙포에 짓고 무금이라 써서 현판을 달았다. 대개 지명에 따른 것이지만 착한 것은 아무리 취해도 금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壁上大書守死善導四字以爲觀省 此先公病革時口不能言于書而示者也
벽 위에다 수사선도(守死善道) 네 글자를 써 붙이고 보면서 스스로를 반성하였다. 이것은 부친께서 임종할 때 말씀을 못하고 손수 써 주신 것이다.
座右又書崇貞年號以寓不忘之義
좌석 오른편에 숭정년호를 써놓고 있었는데 명나라를 잊지 않는 뜻인 듯하다.
夢中作詩曰有人贈寶刀秋蓮可三尺欲斬可汗頭龍光空閃
꿈속에서 시를 지었는데 어떤 사람이 보도를 주는데 추련처럼 거의 삼척이어라. 오랑캐 수장의 목을 치는 데 용광이 덧없이 번쩍 빛나는구나.
爍苟非偉忠卓節素所蓄積何能有發於夢寢之間哉
진실로 특별한 충절심이 평소에 가득 차 있지 않고서야 어찌 꿈에서까지 이렇게 나타났으랴.
臨終亦以口訣授子孫曰志宜立氣宜和言宜慎動宜重 此其平日用工之方也
임종할 때 자손들에게 구결을 남겼는데 뜻을 올바르게 세우고 기를 세우고 기를 화하게 하고 말을 신중하게 하며 동작을 무겁게 하라 했다. 이것이 공의 평생 동안 처신한 방법이었다.
庚辰三月三日考終于寢 享年七十七是年葬于靈山縣狸谷卯向之原從先兆也
경진(1700)년 삼월삼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칠십칠 세였다. 묘는 영산현 이곡 묘향원으로 선영하에 모셨다.
配碧珍李氏樂窮堂汝樟之女 有淑德閨範墓本縣詩南山巳向之原
배는 벽진 이씨이며 낙궁당 여장의 딸이다. 부덕이 있었으며 묘는 본군 시남산에 사향원으로 모셨다.
生四男一女男命溥命漸命濬命游女適成南奎
사남일녀를 두었는데 명부 명점 명준 명유이며 사위는 성남규이다.
命溥生期萬期百期億 命漸生期遠期大 命濬生期達 命游生期一期亨期輔期壽 外孫大亨大臨大護
명부의 아들은 기만 기일 기덕이요 명점의 아들은 기원 기대이며 명준의 아들은 기달이요 명유의 아들은 기일 기향 기보 기수이다. 외손자는 대형、대림、대호이다.
曾玄以下不盡錄
증현손 이하는 기록치 않는다.
銘曰 漁村之子 拙軒之孫 可學之傳 典刑之存 衣履之藏 可以嗣而 護而尊
명에 어촌의 아들이요 졸헌의 손자이기에 가풍과 학문의 전통을 이어 오롯한 규범이 보존되리라。묘소는 마땅히 대를 이어 수호하고 존숭하리라
通政大夫前行敦寧府都正 清州 鄭來錫 謹撰
통정대부 전행돈녕부도정 청주 정래석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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