漁村楊君墓碑銘
君諱咺字以貞 姓楊氏其先密城人 高麗侍中起後也 高祖洙曾祖建成皆成均上舍 祖孝立父許國皆
以特行稱 母江陽李氏獻陵參奉光祿之女 弘文館校理迪之曾孫也 君倜儻慕高 行夙成自為兒時已如成人又能讀書力 學二十一成進士 當光海之末閉大妃於西宮用事者日今館諸生亦上疏言當廢 謂之大論 云君耻之不應榜 以歸 時江右士論務大言禮法以爲利階得官者皆是 君笑之曰 寧服優之服誦優之言以資衣食無愧也 癸亥光海之廢以先君之命入太學太學諸生多慕與之交者 方國家中興選用才學士天官為之注疑者數而不及一命命也 君平生好直義勇往不肯下氣與人苟合 以此不悦者多而亦以此見重 君有母之喪 食粥居廬不脱絰帶三年哭之 幾滅性喪服在為母期君 子行禮猶恐其不盡於禮也 不降非禮也 君子以爲孝子之過也 丙子之亂南漢受圍急君 起義兵馳赴亂聞 乘輿下城亡草澤終身不出 君五十四歿疾病 屏婦女母得居前男道南請問終身行之者 君已不能言書十六字與之 亦書不成其家 識者守死善道四字 而已遂絕庚寅十一月十八日 明年正月葬靈山縣西狸谷之原 有所著漁村遺卷傳於家 妻善山金氏司宰監副正在鎔之女也 生一男一女 男道南 婿朴晸皆士人孫四人 命溥 命漸 命濬 命游 外孫三人 明翰 明會 明德
其銘曰 仲尼遺言 不曰白乎 涅而不緇 不曰堅乎 磨而不磷 不緇不磷 以遺後人
通訓大夫前行三陟都護府使 許穆 撰仍篆
漁村楊君墓碑銘
어촌 양군 묘비 명
君諱咺字以貞 姓楊氏其先密城人 高麗侍中起後也
군의 휘는 훤이며 자는 이정이다. 성은 양 씨로서 그 선조는 밀성인으로 고려 시중 기의 후손이다.
高祖洙曾祖建成皆成均上舍 祖孝立父許國皆以特行稱
고조부는 수이며 증조부는 건성이신데 두 분이 다 성균관 상사였으며 조부는 효립이요 아버지는 허국인데 다 훌륭한 분들이었다.
母江陽李氏獻陵參奉光祿之女 弘文館校理迪之曾孫也
어머니는 강양이씨 헌릉 참봉 광록의 딸이며 홍문관 교리 적의 증손이다.
君倜儻慕高 行夙成自為兒時已如成人又能讀書力學二十一成進士
군은 쾌활하고 고절을 사모했으며 학문과 행실이 조숙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성인과 같았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에 힘을 기울여 이십일 세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
當光海之末 閉大妃於西宮用事者日今館諸生亦上疏言當廢謂之大論云 君耻之不應榜以歸
그 때가 광해군 말기여서 대비를 서궁에 가두게 되었는데 그를 주동한 무리들이 관생들로 하여금 날마다 상소를 올려 폐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대론을 내세우게 되자 군은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대과에 응시하지 않고 고향에 돌아왔다.
時江右士論務大言禮法以爲利階得官者皆是
이때 대북의 무리들은 말하기를 그것을 큰 예법인양 큰소리치면서 이익 챙기는 계제로 삼아 벼슬을 얻은 자는 모두 옳다고 했다.
君笑之曰 寧服優之服誦優之言以資衣食無愧也
그러나 군은 웃으며 말하기를 그럴 바에 야 차라리 광대의 옷을 입고 광대 말을 중얼거리면서 의식을 취하는 것이 보다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癸亥光海之廢以先君之命入太學太學諸生多慕與之交者
계해(1623)년에 광해군을 폐하게 되자 그 선친의 명령으로 태학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태학의 제생들이 그를 사모하여 더불어 사귀는 자가 많았다.
方國家中興選用才學士天官為之注疑者數而不及一命命也
바야흐로 국가가 중흥하여 재주 있고 배움이 많은 선비를 골라 쓰게 되어 이조에게 수차 추천한 바 있었으나 한 번도 부름을 받지 못했으니 운명의 소치인 듯하다.
君平生好直義勇往不肯下氣與人苟合
군은 평생을 곧고 옳은 것에 용기 있게 나아가기를 좋아하고 의기를 죽여가면서 사람과 더불어 구차하게 영합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以此不悦者多 以此不悦者多而亦以此見重
그러므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많았으며 또한 그러기에 무겁게 보기도 했다.
君有母之喪 食粥居廬不脱絰帶三年哭之幾滅性
군은 모친상을 당하여 죽만 먹고 시묘를 살면서 질대를 벗지 않고 삼년을 곡하면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었다.
喪服在為母期 君子行禮猶恐其不盡於禮也 不降非禮也 君子以爲孝子之過也
상복은 아버지가 계실 때는 기년인데 군자가 예를 행할 때 그 예를 극진히 하지 못할까 오히려 두려워하는데 그것을 법도대로 하지 않았으니 비례가 되므로 군자로서 효도의 지나침이라 하겠다.
丙子之亂南漢受圍急君 起義兵馳赴亂聞 乘輿下城亡草澤終身不出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자 군은 의병을 일으켜 달려갔으나 임금이 성에서 내려와 항복했음을 듣고 초야에 돌아와 종신토록 나가지 않았다.
君五十四歿 疾病屏婦女母得居前 男道南請問終身行之者 君已不能言書
군은 오십 사세로 세상을 떠났다. 병이 위독할 즈음 부녀자를 물리치고 앞에 못 있게 하였다.
男道南請問終身行之者 君已不能言書十六字與之 亦書不成其家 識者守死善道四字
아들 도남이 종신토록 행할 도리를 물었으나 군은 이미 말을 못하고 열여섯 자를 써주었다.
그러나 글씨가 잘 되지 않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수사선도 네 글자뿐이었다.
而已遂絕庚寅十一月十八日 明年正月葬靈山縣西狸谷之原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그 날이 경인(1650)년 십일월십팔일이었다. 다음 해 정월에 영산현 서리곡원에 장사 지냈다.
妻善山金氏司宰監副正在鎔之女也 生一男一女 男道南 婿朴晸皆士人孫四人 命溥 命漸 命濬 命游 外孫三人 明翰 明會 明德
배 선산 김씨는 사직 감 부정 재용의 딸로서 일남일녀를 두었다. 아들 도남과 사위 박정이 있는데 다 선비였다. 손자가 넷인데 명부 명점 명준 명유이며, 외손이 셋으로서 명한 명회 명덕이다.
其銘曰 仲尼遺言 不曰白乎 涅而不緇 不曰堅乎 磨而不磷 不緇不磷 以遺後人
명에 공자님께서 말씀 남기기를 좀 희랴, 흙탕물에 담가도 검지 아니하고 좀 단단한가. 갈아도 닳지 않는구나 하시었다. 검지도 않고 닳지도 않음이여. 이로써 후인들에게 남기노라.
通訓大夫前行三陟都護府使 許穆 撰仍篆
통훈대부 전행삼척도호부사 허목이 짓고 전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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