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州楊氏(密城君派)

拙軒楊先生墓碑文

-수헌- 2022. 1. 3. 14:38

拙軒楊先生墓碑文

日楊斯文應奎袖其先祖拙軒公行狀之文踵而屬銘於餘曰吾先祖以林下邃學為嶠南宗匠雖未顯揚

當世士林所推重將百世如一日而世代寢邈雲仍零替公之言行事蹟猶懼其煙晦無傳令以牲石之文冒煩軌事團所以不朽餘敬而作曰念昔郡守公廷彬以拙翁肖孫遇知我王考枕松公十年官遊出處行臧惟我枕松公是仗日夕左右倚以為重此餘弱 冠時所覩記而欽服者也 今君於郡守公為從祖孫而繼其祖未卒之志舉幾年未遑之典慎重文字必來請於不侫者以兩家世好故也 何敢以不文辭謹按狀而敘之曰 公諱許國字國耳姓楊氏 其先密城人有諱起以 元朝光祿大夫從公主下嫁為高麗侍中 洪武中奉使入

天朝力陳貢獻四弊貢籍歸正及還 王嘉之封黨伯卒諡忠憲 有諱根以蔭封密城君遂以密爲貫 高祖諱自敷文科通 曾祖諱洙成均生員 祖諱建成均生員與金東岡宇 顒吳德溪健麗澤相資 考孝立以特行 聞當壬辰倭亂 從郭忘憂堂倡義卒於陣中 妣光州金氏光胤女 萬曆丙子十月初三日生公於漁村里 第公自孩提儀狀超凡文 藝日就十歲能賦詩 十六發鄉解及長遊於成芙蓉堂之門 先生常以畏友稱之遂廢擧子業深究理氣之學常曰讀聖賢書不思軆認惟進取是圖是自欺也與不讀何異視榮利澹如也 兵燹中丁外艱雖在幹戈 搶壤時喪葬以禮晨夕不廢展省朔望必虔饋奠及遭內艱惟 歠粥糜不 脫絰帶三年居廬柴毀幾至滅性鄉隣稱其孝 旣闋搆數棟於山下松楸其終身追慕之誠蓋如 長子進士公先公而逝公抑情理遣不作悲 疚容以子夏喪明爲戒 晩年樓遯於洛涯之南 扁其堂曰拙軒仍以自號 左右圖書嘯詠自娛 寒岡鄭先生時適知縣頻頻來 會講磨義理常曰君南鄉師表也 其見推於先生槩 可見矣且奉先之節盡其誠敬遇讐月則終其月不衆會及忌日則終其日齋沐端坐處於 門族極其敦睦喪祭之相助 疾病之相救不以遠近 而有間不以衰老而或怠 己亥六月初八日考終於正寢享年八十四 疾革有曰八十四年今日是九原歸路即朝昏貽謀膝下知何事孝悌 親仁後學問邑誌 載此詩有遺集若干篇附葬於靈山尼谷先塋下乾坐之原 配江陽李氏獻陵參奉光祿女 弘文校理迪之後 生三男二女 男長晅進士男晪次暻 女進士李涑 次適盧世茂 咺娶善山金氏副正在鎔女 生一男道南 晪娶商山周氏 參奉國老女生二男道俱道明 暻娶光州盧氏克諧女生一男道胤 李涑生四男時松時檉時相時橏 盧世茂生二男碩賓文科縣監碩望 餘不盡錄

銘曰 稱以畏友 謂之師表 兩先生推 詡斯的餘 何更贅鑱 彼貞珉 過者必式

 

嘉善大行兵曹參判 沈東臣謹撰

 

 

拙軒楊先生墓碑文

졸헌 양선생 묘비문

日楊斯文應奎袖其先祖拙軒公行狀之文踵而屬銘於餘曰

어느 날 유학자 응규가 그 선조 졸헌공의 행장을 가지고 찾아와서 나에게 비명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吾先祖以林下邃學為嶠南宗匠雖未顯揚 當世士林所推重將百世如一日

나의 선조가 깊은 학문을 해서 영남의 큰 선비였는데 비록 크게 드러내지는 못했으나 그 때의 사림들이 소중히 여기고 추대한 것은 백세가 지나도 마찬가지인데

而世代寢邈雲仍零替公之言行事蹟猶懼其煙晦無傳令 以牲石之文冒煩軌事團所以不朽餘

세대가 삭막하고 자손이 영락하여 공의 언행과 사적이 인멸되어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 이제 번거롭지만 돌에 새겨 영구히 없어지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고 했다.

敬而作曰念昔郡守公廷彬以拙翁肖孫

내가 공손히 말하기를 생각컨대 옛 군수공 정빈은 졸헌옹의 후손으로서

遇知我王考枕松公十年官遊出處行臧惟我枕松公

나의 조부 침송공과 친분이 두터워 십년간 관직 계실 때 세상에 나아가는 것과 들어서 숨는 것을 오직 침송공과 상의하셨으며

是仗日夕左右倚以為重此餘 弱冠時所覩記而 欽服者也

조석으로 왕래하여 서로 의지하고 서로 존중하는 것을 내가 이십대에 본 일이 기억이 나며 흠복했던 처지였다.

今君於郡守公為從祖孫而繼其祖未卒之志舉幾年未遑之典

이제 군수공의 종조손간인 군이 그 할아버지가 다하지 못했던 뜻을 이어 여러 해 동안 엄두도 못낸 큰일을 거행하는 데 있어

慎重文字必來請於不侫者以兩家世好故也 何敢以不文辭

신중한 글을 하필 나한테 와서 청하는 것은 양가의 세의가 깊은 까닭이다. 어찌 글을 잘 못한다 해서 사양할 수 있으랴.

謹按狀而敘之曰公諱許國字國耳姓楊氏

삼가 장문 등을 살피건대 공의 휘는 허국이며 자는 국이로서 성은 양씨이다.

其先密城人有諱起以元朝光祿大夫 從公主下嫁為高麗侍中

그 선조는 밀성인으로서 휘 기가 원나라 광록대부였는데 공주가 시집올 때 따라와서 고려의 시중이 되었다.

洪武中奉使入天朝力陳貢獻四弊貢籍歸正及還 王嘉之封黨伯卒諡忠憲

홍무(명나라 태조 때의 연호)말에 사신으로 중국에 가서 사대세공의 폐단을 역설하여 공물장부를 수정하고 돌아왔다. 임금이 가상히 여겨 상당백을 봉하였고 돌아가셨을 때 시호를 충헌으로 내리셨다.

有諱根以蔭封密城君遂以密爲貫

휘 근은 음덕으로 밀성군을 봉했는데 마침내 밀성을 향관으로 쓰게 되었다.

高祖諱自敷文科通政 曾祖諱洙成均生員

고조부의 휘는 자부로서 문과를 거쳐 통정이었으며, 증조부의 휘는 수로서 성균생원이며,

祖諱建成均生員與金東岡宇顒吳德溪健麗澤相資

조부의 휘는 건성으로 성균생원인데 김동강 자옹、오덕계 건과 더불어 서로 절친하게 지냈다.

考孝立以特行 聞當壬辰倭亂 從郭忘憂堂倡義卒於陣中

아버지의 휘는 효립이며 특행으로 유명했다. 임진왜란 때 망우당 곽재우를 따라 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진중에서 돌아가셨다.

妣光州金氏光胤女

비는 광산 김씨 광윤의 딸이다.

萬曆丙子十月初三日生公于漁村里

공은 병자(1576)년 시월초삼일에 어촌리에서 태어났다.

第公自孩提儀狀超凡文藝日就十歲能賦詩 十六發鄉解及

공은 어려서부터 외모가 비범하고 문재가 날로 더하여 십세에 시를 능히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십육세에 향해(고을의 백일장 장원)에 뽑혔다.

長遊於成芙蓉堂之門先生常以畏友稱之 遂廢擧子業深究理氣之學

장성하면서 성부용당 문하에 들었는데 선생이 항상 고을의 외우라 일컬었고, 마침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이기(성리학에서, 우주의 본체인 이와 그 현상인 기)설을 탐구하였는데

常曰讀聖賢書不思軆認惟進取是圖是自欺也與不讀何異視榮利澹如也

언제나 말하기를 성현의 글을 읽고 몸소 체험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다만 과거할 생각만 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으로서 글을 읽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하면서 영화나 이익 보기를 담담히 했다.

兵燹中丁外艱雖在幹戈 搶壤時喪葬以禮晨夕不廢展省朔望必虔饋奠

병란중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비록 난중일지라도 장례를 예법대로 하고 조석으로 성기를 폐한 일이 없으며 삭망에는 반드시 상식을 정성껏 올렸으며

及遭內艱惟 歠粥糜不 脫絰帶三年居廬柴毀幾至滅性鄉隣稱其孝

모친상을 당해서는 오직 죽만을 마시며 상복을 벗지 않고 삼 년 동안 시묘를 해서 애통하여 몸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향리사람들이 지극한 효성이라고 일컬었다.

旣闋搆數棟於山下 松楸其終身追慕之誠蓋如此

복을 마치고 집 몇 채를 묘아래 지었다. 그리하여 종신토록 추모하는 정성이 이와 같았다.

長子進士公先公而逝公抑情理遣不作悲疚容以子夏喪明爲戒

큰아들 진사공은 공보다 먼저 작고하였으나 공은 비통함을 억제하고 슬프고 걱정된 얼굴을 짓지 않고 자하가 상명한 것을 경계로 삼았다.

晩年樓遯於洛涯之南 扁其堂曰拙軒仍以自號 左右圖書嘯詠自娛

만년에는 낙애(낙동강 변)의 남쪽에 은거해 살면서 그 집의 이름을 졸헌이라 하고 자호로 삼고 좌우에 쌓인 도서를 읽고 읊조리면서 스스로 즐거워했다.

寒岡鄭先生時 適知縣頻頻來 會講磨義理常曰君南鄉師表也 其見推於先生槩可見矣

한강 정선생이 당시 이 고을의 현감이었는데 자주 와서 만났으며 의리에 대하여 강론하고 닦았으며 항상 말하기를 군은 남향의 사표라 하였으니 그것이로 미루어 봐도 선생으로 추대 받았음을 알 수가 있다.

且奉先之節盡其誠敬遇讐月則終其月不衆會及忌日則終其日齋沐端坐處於

또한 선조를 받드는 절도에 있어서도 정성과 공경을 다했으며 친상을 당한 달이면 대중의 모임에 불참하였으며 기일에는 목욕하고 종일 단정히 앉아 있었다.

門族極其敦睦喪祭之相助 疾病之相救不以遠 近而有間不以衰老而或怠

일가를 극히 돈목하게 대접하고 상제 때에나 질병이 있을 때는 서로 구호도록 하였으나 원근과 친소 두지 않고 노쇠할 때 까지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己亥六月初八日考終於正寢享年八十四

기해(1659)년 유월초팔일에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시니 향년 팔십사세였다.

疾革有曰 八十四年今日是 九原歸路即朝昏 貽謀膝下知何事 孝悌親仁後學問

병이 위중할 때에 시를 지으셨는데, 팔십 사년이 오늘로써 끝나나보다. 구원으로 돌아가는 길 아침저녁을 못 가리는 데 슬하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효제 친인한 후에 학문을 하라.

邑誌 載此詩有遺集若干篇

이 시가 읍지에 기재되어 있으며 문집 약간편이 있다.

附葬於靈山尼谷先塋下乾坐之原

영산 이곡선영 밑 건좌원에 부장하였다.

配江陽李氏獻陵參奉光祿女弘文校理迪之後

배는 강양 이씨로서 헌릉참봉 광록의 딸로서 홍문관교리 적의 손자이다.

生三男二女 男長晅進士次男晪次暻

삼남 삼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훤으로서 진사를 지냈으며 차남은 전이며 삼남은 경이었다.

女進士李涑 次適盧世茂 咺娶善山金氏副正在鎔女 生一男道南

장녀는 이속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노세무에게 출가했다. 훤은 선산금씨 부정 재용의 딸을 취하여 일남을 낳았으니 도남이며

晪娶商山周氏 參奉國老女生二男道俱道明

전은 상산 주씨 참봉 국노의 딸을 취하여 두 아들을 두었으니 도구, 도명이다.

暻娶光州盧氏克諧女生一男道胤

경은 광주 노씨 극해의 딸을 취하여 일남을 두었는데 도윤이다.

李涑生四男時松時檉時相時橏

이속이 사남을 두었는데 시송、시정, 시상, 시전이다.

盧世茂生二男碩賓文科縣監碩望

노세무가 이남을 두었는데 석빈은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이었으며 다음이 석망이다.

餘不盡錄

이하는 다 적지 않는다.

銘曰 稱以畏友 謂之師表 兩先生推 詡斯的餘 何更贅鑱 彼貞珉 過者必式

명에 외우라 일컫고 사표라 일컬어서 두 선생이 추앙하기를 이처럼 하였는데 내 무어라고 다시 덧붙여 말하랴. 높은 저 비석이여﹐ 지나가는 자 반드시 구부려 절하리라

 

嘉善大行兵曹參判 沈東臣謹撰

가선대부 행병조참판 심동신 삼가 짓다

 

拙軒公 묘소
拙軒公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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