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州楊氏(密城君派)

南溪公墓碑銘

-수헌- 2022. 1. 3. 23:13

南溪公墓碑銘

南溪先生楊公之歾門人孫儉庵佺收公遺文 爲兩卷既跋之又狀其行 使公之孫綎藏于家 不幸世遠不

守惟狀與跋載在儉庵集 矣十二世胄孫達奎 九世孫基煥等 慨公墓無表 以其狀跋示耆悳曰 信筆也 願據此有書焉余竊 惟之公吾鄕先輩也 藐然後生夙抱高景 乃敢不辭而為之叙曰 公諱耆國字國老南溪自號也 上祖忠憲公起來自中國為上黨伯得貫清州 中因密城君根移密城 密城君玄孫曰 府使好生始家 昌寧於公間七世 曾祖汶聞慶訓導 祖大成鄭文穆先生之宰 本縣爲詳定使 籍善惡事在勸懲案 考正立 外祖密陽孫斗 公天賦朴素峻 整事親生 孝生致懽喪盡 哀葬廬墓廟 必晨謁有新物則薦 友晜季極湛樂 視諸姪 若已出至於敬尊長 親執事酬 凡衆各盡其道 常懷慷慨 讀史至宋徽欽 紀及我南溪日錄輒鳴咽流涕 平生著述尚古脫俗 而累屈鄕解則曰命也 不復屑意耕 鑿嘯詠以終老焉 崇陵辛亥十一月十五日卒 距其生穆陵二月十五日 享七十歲 葬縣南環谷負乾元 配盆城裵氏復古堂涵女 參判孟厚五世孫墓附 三男以茂德茂興茂宣傳 二女李昌仁李照 以茂男綎綬緬縉 女盧時鋑主簿趙時琥 德茂男緯 興茂男絿綖純緝絢

銘曰 行誼之篤 文學之邃 居今慕古 一誠無僞 嗟董誰儔 若嚴世棄 親灸筆信 余銘無愧

己亥二月下澣

昌寧 成耆悳 謹撰

 

 

南溪公墓碑銘

남계공 묘비명

南溪先生楊公之歾門人孫儉庵佺收公遺文 爲兩卷既跋之又狀其行

남계선생 양공이 돌아가신 후 제자 검암 손전이 공의 유문을 수집하여 두 권으로 만들어 발문과 행장을 지어서

使公之孫綎藏于家 不幸世遠不守惟狀與跋載在儉庵集矣

공의 손자 정의 집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불행하게 분실되었고 발문과 행장은 검암집에 올려 있었다.

十二世胄孫達奎 九世孫基煥等 慨公墓無表 以其狀跋示耆悳曰 信筆也 願據此有書焉余竊

십 이세 손 달규와 구세 손 기환 등이 공의 묘에 비석 없음을 민망히 생각하여 행장과 발문을 갖고 찾아와서 말하기를 이것은 믿을 수 있는 글이니 이것을 근거로 해서 묘비문을 써달라고 한다.

惟之公吾鄕先輩也 藐然後生夙抱高景 乃敢不辭而為之叙曰

생각컨대 공은 우리 고장의 선배이신데 후생으로서 일찍 높은 덕망을 듣고 있었으므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짓는 바이다.

公諱耆國字國老南溪自號也

공의 휘는 기국이며 자는 국로요 호는 남계이다.

上祖忠憲公起來自中國為上黨伯得貫清州 中因密城君根移密城

시조이신 충헌공 기가 중국에서 나오시어 상당백이 되고 본관을 청주로 받았는데 밀성군으로 인하여 밀성을 향관으로 쓰고 있다.

密城君玄孫曰府使好生始家昌寧於公間七世

밀성군의 현손으로 부사였던 호생이 창녕에서 비로소 살게 되었으니 공의 칠세조이시다。

曾祖汶聞慶訓導 祖大成鄭文穆先生之宰 本縣爲詳定使 籍善惡事在勸懲案

증조부 문은 문경 훈도이며 조부 대성은 정문목 선생이 본현 현감으로 있을 때 정해 논 선악을 기록한 근징안에 올려져 있다.

考正立 外祖密陽孫斗

아버지는 정립이며 외조부는 밀양 손두이다.

公天賦朴素峻 整事親生 孝生致懽喪盡 哀葬廬墓廟 必晨謁有新物則薦

공은 천품이 소박 준엄하였으며 어버이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생전에는 기쁘게 하고 돌아가심에 슬픔을 다했으며 장례 후에는 시묘를 했을 뿐 아니라 사당에 이른 새벽에 배알 했으며 새로운 음식이 생기면 곧 바치고 했다.

友晜季極湛樂 視諸姪若已出至於敬尊長親執事酬凡衆各盡其道

아우들을 언제나 즐겁게 했고 조카들을 자기 아들 같이 생각했고 존장을 공경함은 물론 집사에게 친절했으며 일반 친구들 에게도 각각 도리에 맞도록 하였다.

常懷慷慨 讀史至宋徽欽 紀及我南溪日錄輒鳴咽流涕

항상 강개지심을 품고 있었는데 송휘흠이 쓴 기를 읽다가 남계일록에 이르러서는 매번 눈물을 흘리었다.

平生著述尚古脫俗 而累屈鄕解則曰命也 不復屑意耕 鑿嘯詠以終老焉

평생에 저술한 글이 고상하고 탈속한 데도 여러 번 향시에 떨어진 것을 운명으로 여기고 밭 갈고 시를 읊으면서 일생을 마쳤다.

崇陵辛亥十一月十五日卒 距其生穆陵二月十五日 享七十歲 葬縣南環谷負乾元

현종 신해(1671)년에 돌아가셨으니 선조 임인(1602)년생으로 향년 칠십세였다。묘는 현의 남쪽 환곡 건좌이다.

配盆城裵氏復古堂涵女參判孟厚五世孫 墓附

배는 분성 배 씨 부고당 함의 딸이며 참판 맹후의 오세손이다. 묘는 합부이다.

三男以茂德茂興茂宣傳 二女李昌仁李照

삼남을 두었는데 이무、덕무、흥무인데 흥무가 선전관이다. 이녀는 이창인、이조에게 시집갔다。

以茂男綎綬緬縉 女盧時鋑主簿趙時琥 德茂男緯 興茂男絿綖純緝絢

이무의 아들은 정, 수, 면, 진이며 사위 노시전은 주부였고 또 한 조시호였다. 덕무의 아들은 위이며 흥무의 아들은 구 연 순 집 현이다.

銘曰 行誼之篤 文學之邃 居今慕古 一誠無僞 嗟董誰儔 若嚴世棄 親灸筆信 余銘無愧

명에 품행이 독실했으며 학문이 깊었어라. 옛 성현을 사모하여 자못 성동하고 거짓이 없었네. 휘장 치고 독서하던 동소남의 짝이런가. 칠리탄에 숨어 살던 엄자릉과 같다 할까. 제자의 믿음직한 글이었기에 나의 명도 부끄럼 없네

己亥二月下澣

기해년 이월 하순에

昌寧 成耆悳 謹撰

창녕 성기덕이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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