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完譯』蓬萊詩集(완역 봉래시집)-楊士彦/賦, 文, 記. (부, 문, 기.)

飛字記 (비자기) - 西坰 (서경)

-수헌- 2025. 1. 29. 23:19

 

飛字記   비자기     西坰   서경

楊蓬萊 辛巳年間 謫海西 甲申五月二日 捐館舍

양봉래는 신사년(1581년)간에 해서로 귀양을 갔다가 갑신년(1584년) 오월 이일 별세하였다.

蓬萊於甲子歲 卜居于嶺東之高城都九仙峯下鑑湖之上 名其亭曰飛來

봉래공은 갑자년에 영동 고성읍 구선봉 아래 감호 위에 거주했는데 그 정자를 비래정이라고 이름했다.

束鯨鬚爲大筆 手書扁額 飛字先成 來亭二字 屢書不稱意

고래수염으로 큰 붓을 엮어서 편액을 썼는데 비(飛)자는 먼저 완성했으나 래정(來亭) 두자는 여러 번 써도 맘에 들지 않았다.

將飛字爲簇 挂亭齋之壁上 留一力 守其亭 一日 大風猝起 亭齋鎖戶自開 書籍孱簇 卷出于外

비자만 족자를 만들어서 정재 벽에 걸어두고 한 사람을 두어 정자를 지키게 했는데, 어느 날 큰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정재의 닫힌 문이 저절로 열리더니 서적과 족자가 모두 밖으로 날아 나왔다.

落于地者 得以收拾 殆無散失 獨飛字一簇 騰空指海 漸高漸遠 追者至海岸 杳不知其所往

땅에 떨어진 것은 주워서 수습하여 잃을 위험이 없었으나 비(飛)자 족자 하나만은 공중을 날아 바다로 향했다. 점점 높이 점점 멀리 날아가서 바닷가까지 따라갔으나 아득하여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厥後 考其時日 則蓬萊在謫所乘化之日也 吁其異哉

그 뒤 그때와 날을 상고해 보니 곧 봉래공이 귀양 간 곳에서 승화한 날이었으니 그 기이함에 탄식했다.

江陵居進上崔雲吉 曾摸得一本 今幸不失於灰燼之餘

강릉에 거주하는 진사 최운길이 일찍이 모본 한 점을 만들어 놓았으니. 다행히 불타 재로 없어지지 않고 지금 남아 있다.

蓬萊胤子茂長太守楊公 以根嘗獲拜淸塵 要一言識之

봉래공의 맏아들이 무장 태수 양공[楊萬古]인데 나의 소개로 그분을 뵙고 인사하고, 한 말씀 구하니 알아보았다.

吾先人 卽蓬萊司馬同年嘉靖庚子榜也

나의 선친은 봉래공과 가정 경자년(1540년) 같은 해에 사마시에 급제했다.

丁丑秋 根出宰鶴林縣 蓬萊適爲安邊府伯

정축년(1577년) 가을 내(근)가 학림현 수령으로 나갔을 때 봉래공은 안변 부사로 계셨다.

根馳書相問 請偕賞國島 國島 安邊地也

내가 글을 보내 서로 안부를 묻고 국도를 함께 구경하기를 청했다. 국도는 안변 땅이다

蓬萊答書曰 陪遊國島 未可期 鏡裏芙蓉 天邊螺䯻 是吾家屛障 近欲往尋舊棲 準擬歷拜敍懷云 所謂屛障者

봉래공이 답서에서 국도를 같이 유람하는 것은 기약할 수 없다고 하며, 거울 속 부용처럼 하늘가의 산들이 내 집을 가려 막았으니 예전 살던 곳을 찾아가서 두루 다니며 회포를 풀고 싶어도 이른바 병풍처럼 가로막혔다고 했다.

實飛來亭所有九仙峯鑑湖之謂也 旣島與之期會鶴浦 浮舟入海 飫觀國島 未久 乘籃輿來訪于鶴林

실제 비래정은 구선봉 감호라고 하는 데 있는데 이미 학이 모여드는 섬이 되어 배를 띄워 바다로 들어가야 국도를 마음껏 볼 수 있다. 오래지 않아 수레를 타고 왔더니 학 숲일 뿐이었다.

許我爲忘年交 出根所賦絶句五六首袖去 約手書而送 卽戊寅年也

나이와 관계없이 나를 벗으로 사귐을 허락하셨고 내가 나갈 때는 부나 절구 대여섯 수를 지어 소매에 넣어 갔다. 글을 써서 보낸 때가 곧 무인년(1578년)이었다.

根己卯遞來 仕于朝 蓬來在任 至辛巳謫去 每一念至 不覺悽然蓬萊雖在塵中

내가 기묘(1579년)년에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출사하여 조정에 나가니 봉래께서 재임하고 계셨는데, 신사년(1581년)이 되어 귀양을 가시니 오로지 한 결같이 그리웠고, 누가 봉래를 진탕에 빠뜨렸는지 알 수 없어 처연하였다.

實超世外 蕭灑如王右軍風流 如賀季眞筆法

실제 세상 밖을 벗어나 풍류가 왕희지와 같이 운치가 있었고 필법은 하계진과 같았다.

詞章爲世所推 畢竟溘然於謫所 惜哉 其天才不可復見

시가와 문장이 세상의 추앙을 받았지만, 마침내 귀양지에서 돌아가시니 안타깝구나. 선생의 비범한 재능을 다시는 보지 못하겠구나!

今此一事 不可使泯滅 爲賦詩六韻 遂書以示之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으니 시 여섯 운을 지어서 글로 써서 알리고자 한다.

詩曰

시로써 이르노니

隻字龍疑活 空齋勢欲飛

글씨 한자도 용이 살아있는 듯 빈 서재에서 날아가려 하여

長風忽馬簸 極海杳何追

장풍이 돌연 불어오니 먼바다 끝까지 어찌 좇을 수 있으랴

不是雷公取 寧知鬼物爲

뇌공이 가져가는 것도 아닌데 어찌 알고 귀물이 되었을까

羈魂隔千里 筆迹失同時

나그네 혼이 천리나 떨어졌어도 필적이 동시에 사라지니

絶寶終難棄 三山倘獲隨

절세보물을 버리기 어려워 삼산이 따라가 잡은 게 아닐까

應緣氣聚散 不必訝神奇

응당 인연의 기운이 모였다 흩어져도 신기가 놀랄 일 아니네

海中有三神山云

바다속에는 삼신산이 있다고 한다

乙丑初冬之晦 西坰居士柳根

을축년 시월 그믐날 서경거사 유근

 

※捐館舍(연관사) : 살고 있던 집을 버린다는 뜻으로, ‘사망’을 높여 이르는 말.

※淸塵(청진) : 청고(淸高)한 유풍(遺風)이나 고상한 기질을 뜻하는 말로, 상대방에 대한 경칭(敬稱)이다.

※出宰(출재) : 옛날 중앙관원이 지방 수령으로 나가는 일.

※忘年交(망년교) : 나이를 가리지 않고 벗으로 사귐.

※雷公(뇌공) : 천둥과 번개를 일으키는 일을 맡고 있는 신.

 

*유근(柳根, 1549~1627)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회부(晦夫). 호는 서경(西坰). 1578년 문장으로 일본 승려 겐소(玄蘇)를 놀라게 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임금을 모신 공으로 부원군이 되었으며, 벼슬은 대제학과 좌찬성에 올랐다. 저서에 서경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