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溟大師의 충절과 詩

四溟大師-일본으로 가다(일본 을 가르치다2)

-수헌- 2020. 7. 18. 15:28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에 사명대사의 높은 이름을 들은 왜승들이 가는 곳마다 구름같이 떼를 지어 모여 와서 불도를 구하기도 하고, 말씀을 청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으나 일일이 가르쳐 주었다. 혹은 농락하는 시를 지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일본 사람의 패기를 꺾기도 하면서 속 시원하게 깨우쳐 주니 부처를 믿고 복을 구하는 무리들은 이르는 곳마다 사명대사에게 절을 하며 부처님이라고도 하고 조사(祖師)라 칭하기도 하였다.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왜승들에게 써준 찬이나 시는 셀 수 없이 많으나 일일이 소개 할 수 없어 그중 몇수만 소개한다.

 

達磨後品 달마 후품

달마를 뒤에 평하다

玉毫收彩已多時 옥호수채이다시

옥호(玉毫)가 빛을 거둔 지 이미 오래되니

俶世頑愚未可治 숙세완우미가치

세상의 어리석은 무리 다스릴 수 없네

茶毘後品難陣說 다비후품난진설

다비(茶毘)를 뒤에 말로써 평하기 어려워

泣盡松雲白雪眉 읍진송운백설미

울다가 그치니 송운의 눈썹이 백설이 되었네

玉毫(옥호) : 부처님 두 눈썹 사이의 흰털. 부처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은 깨끗하고 부드러워 세향(細香)과 같으며, 오른쪽으로 말린 데서 끊임없이 광명(光明)을 방사한다고 한다. 옥호에서 광명이 난다 하여 옥호 광명(玉毫光明)이라고도 한다.

 

倭僧悟初持達麼幀來見仍以徵讃書之

왜승오초지달마정래견잉이징찬서지

왜승 오초(悟初)가 달마의 영정을 가지고 와서 보이며 찬을 청하기에 써 주다

 

十萬里來青眼少 십만리래청안소

십만 리를 왔어도 청안은 젊었으나

九年虚度少林春 구년허도소림춘

소림(少林)에서 구 년 세월 헛되이 보냈도다

不逢末後神光拜 불봉말후신광배

뒤늦게 신광의 절을 받지 못했다면

也是流沙浪走人 야시류사랑주인

유사를 떠도는 낭인이 되었으리

神光(신광): 선종의 2조 혜가대사(慧可大師, 487~593). 중국 낙양 사람으로, 낙양 용문사 향산에서 출가. 40세에 숭산 소림사에 달마대사를 찾아가서 눈 속에 앉아 가르침을 구했으나 허락지 않으므로 자신의 왼팔을 끊어 그 굳은 뜻을 보여 마침내 허락을 받고 크게 깨달았음.

 

贈承兌 증승태

승태에게 주다

 

雨餘庭院淨沙塵 우여정원정사진

정원에 비가 지나니 티끌이 맑아지고

楊柳東風別地春 양류동풍별지춘

버들에 동풍 부니 별천지의 봄이로다

中有南宗穿耳客 중유남종천이객

그 가운데 남종의 깨달은 이 있으니

世間皆醉獨醒人 세간개취독성인

세상이 다 취했어도 그만 흘로 깨어 있네

승태(承兌) : 풍광사(豊光寺) 주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보좌했으나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따름.

천이객(穿耳客) : 마음의 귀가 뚫린 사람, 깨달음을 얻은 사람

 

次承兌韻 차승태운

승태의 운을 따라

 

世間何處覓藏舟 세간하처멱장주

세상 어느 곳에 숨겨진 배를 찾으려니

天外仙山去路脩 천외선산거로수

하늘 밖의 신선 산은 갈 길이 멀구나

一片孤帆滄海遠 일편고범창해원

한 조각 외로운 돛대 창해가 멀었으니

白頭空恨此生浮 백두공한차생부

흰머리 공연히 떠도는 생을 한탄한다

 

次元佶韻 차원길운

원길의 운을 따라

 

聚散皆因宿有緣 취산개인숙유연

모이고 흩어짐이 모두 속세의 인연이라

海東那料此同筵 해동나료차동연

해동에서 한 자리에 만날 줄 어찌 알았으랴

春亭烹進仙茶飲 춘정팽진선다음

봄날 정자에서 선다(仙茶) 다려 마시니

青草煙花滿眼前 청초연화만안전

푸른 풀 연기 꽃이 눈앞에 가득하네

 

江草江花處處奇 강초강화처처기

강가의 화초가 곳곳마다 기이한데

旅遊春根但吟詩 여유춘근단음시

나그네 봄 시름에 시만 읽고 있도다

孤舟別意明朝在 고주별의명조재

내일 아침에 외로운 배로 이별하리니

回首東風是去時 회수동풍시거시

동풍 불면 머리 돌려 떠나는 때니라

 

원길(元佶); 임제종(臨濟宗)의 승려이자 원광사(圓光寺)의 주지인 엔코 겐키츠(圓光元佶),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군사고문으로 그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으며, 조선으로 돌아온 후에도 사명대사는 겐키츠에게 조선인들을 돌려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달라는 당부의 글을 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