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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調四時詞 -李達(이달)

平調四時詞1 평조사시사1 -李達(이달) 門巷淸明燕子來 문항청명연자래 청명절이라 거리에는 제비가 날아오고 綠楊如霧掩樓臺 녹양여무엄로대 푸른 버들은 안개처럼 누대를 가리네 同隨女伴鞦韆下 동수녀반추천하 동행한 여인과 같이 그네에서 내려서 更向花間鬪草廻 경향화간투초회 다시 꽃 사이에서 투초하고 돌아왔네 ※ 鬪草(투초) ; 풀을 꺾어서 승부를 가리는 아이들의 놀이 平調四時詞2 평조사시사2 -李達(이달) 五色絲針倦繡窠 오색사침권수과 오색 실 바늘로 수놓기도 지겨워서 玉階新發石榴花 옥계신발석류화 옥섬 돌에 석류꽃 새로이 피어났네 銀牀氷簟無餘事 은상빙점무여사 할 일없어 은 침상에 찬 대자리 까니 盡日南園蛺蝶多 진일남원협접다 남쪽 동산에 종일토록 나비 떼가 나네. 平調四時詞3 평조사시사3 -李達(이달) 金井梧桐下玉䦨 금..

嶺南樓次韻詩 2

연전에 영남루에 관한 차운시(次韻詩)를 20수가량 올린 적이 있는데 오늘 같은 운을 차운한 시 몇 수 더 올린다. 次嶺南樓舊韻 차영남루구운 이안눌(李安訥;1571~1637); 자 자민(子敏), 호 동악(東岳). 조선 중기 문신, 형조판서 홍문 관제학 역임 飛甍千尺出層天 비맹천척출층천 날렵한 기와는 하늘 위 천자 높이 솟았고 鈒浦東涯鳳岫前 삽포동애봉수전 사포의 동쪽 물가 무봉산 앞에 있네 隔岸人家竹林外 격안인가죽림외 대숲 밖 강 건너에 인가가 자리 잡고 傍沙漁艇荻叢邊 방사어정적총변 모래사장 갈대숲 곁에 고깃배가 있네 川晴崔顥詩中樹 천청최호시중수 개인 내에는 황학루시의 나무가 비치고 山紫滕王閣上烟 산자등왕각상연 등왕각의 노을에 산이 붉게 물 들었네 三日倚闌歸不得 삼일의란귀부득 난간에 기대 삼일 동안 돌아가지..

손곡(蓀谷)이달(李達)과 봉래(蓬萊)양사언(楊士彦)

봉래(蓬萊)양사언(楊士彦;1517년생)과 손곡(蓀谷)이달(李達;1539년생?)은 20세 이상, 근 한 세대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봉래는 워낙 출중한 손곡의 시재(詩才)를 존중하여 가까이하며 극진히 대하였고 심지어는 서로의 詩에 대해 평을 하는 등의 시우(詩友)로써 교류 하였다. 蓬萊가 蓀谷을 이렇게 존중하고 예우한 것은 그의 시재가 워낙 탁월하였기 때문이지만 그가 서자로 태어나 벼슬도 못하고 방랑하는데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은 봉래(蓬萊)양사언(楊士彦)과 손곡(蓀谷)이달(李達)의 관계를 볼 수 있는 시 몇 수를 올린다. 淮陽府簡寄楊蓬萊 회양부간기양봉래 - 李達 회양부의 봉래 양공에게 올리는 편지 十月發漢陽 시월발한양 시월에 한양을 떠나 今在交洲道 금재교주도 지금은 교주..

移家怨 (이가원) 外

전편에 이어 손곡 이달(蓀谷 李達)이 활동하던 16세기 후반, 전쟁과 관의 수탈로 인해 고통받는 민초들의 생활을 노래한 시와 당시 농촌 풍경을 묘사한 시 몇 수 올린다. 손곡이 피폐한 민초들의 삶이나 관료들의 수탈과 실정을 비판, 고발하는 시를 쓰면서도 그 시어들은 원망적이거나 절망적이지 않고 서정적인 면이 잘 나타난다. 移家怨 이가원 집 옮김을 슬퍼하다 老翁負鼎林間去 노옹부정림간거 할아비가 솥을 지고 숲 속으로 가는데 老婦携兒不得隨 노부휴아불득수 할미는 아이들 데리고 따라가지 못하네. 逢人却說移家苦 봉인각설이가고 사람 만날 때마다 집 옮기는 고통 말하며 六載從軍父子離 육재종군부자리 육 년 종군하느라 부자가 떨어져 산다네. 이 시를 쓴 시기는 아마도 전쟁 중인 것 같다. 이사를 한다기보다 피난이나 어떤 ..

拾穗謠 (습수요) 外

손곡 이달(蓀谷 李達)을 비롯한 삼당시인(三唐詩人)이 활동하던 때는 16세기 후반으로 임진왜란으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고초를 겪던 시기였다. 손곡 이달(蓀谷 李達)은 서자라는 출신의 한계로 벼슬도 하지 않고 전국을 유랑하며 많은 시를 지었는데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시를 많이 지었다. 그러나 방랑생활 도중 피폐한 민초들의 삶이나 관료들의 수탈과 실정을 비판, 고발하는 시도 많이 썼는데 이러한 시 에도 손곡의 서정적이고 풍류적인 면이 잘 나타난다. 拾穗謠 습수요 이삭 줍는 노래 田間拾穗村童語 전간습수촌 동어 밭고랑에서 이삭 줍는 시골 아이 말이 盡日東西不滿筐 진일동서불만광 종일 동서로 다녀도 바구니가 안 찬다네. 今歲刈禾人亦巧 금세예화인역교 올해에는 벼 베는 사람들도 교묘해져서 盡收遺穗上官倉 진수유수상관창 이..

손곡(蓀谷) 詩-別李禮長 外

이 장은 손곡집(蓀谷集)에 실린 손곡(蓀谷)이달(李達)의 시를 통해 그의 생애와 낭만에 대해 알아보고자 만들었다. 이달(李達, 1539년? ~ 1612년?)은 조선의 시인으로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 동리(東里), 서담(西潭)이다. 그는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으로, 조선 초 대문장가인 쌍매당 이첨의 먼 후손이자 부정(副正) 이수함(李秀咸, 秀涵)의 서자로 태어났다. 서자라는 한계로 대과에 응시하지 못했고 다른 서얼들이 응시하는 잡과에도 응시하지 않았으며 잠시 한리학관을 지냈으나 곧 물러나 전국을 떠돌며 주옥같은 많은 시를 지었다. 한 때 강원도 원주 손곡리에 정착하여 당시(唐詩)를 연구했으며 호도 손곡(蓀谷)이라 했다.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과 함께 당시(..

蓬萊 楊士彦-견우 직녀의 노래

경자년(更子年) 들어 미증유의 코로나 사태와 물난리를 겪고 나니 어느새 음력 7월에 접어들었다. 7월은 마침 칠석(七夕) 이 끼어 있어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시(詩) 우녀사(牛女詞; 견우직녀의 노래)를 소개한다. 이 시는 장단구로 된 시인데, 장단구(長短句)란 장구(長句)와 단구(短句)로 이루어진 시로써, 오언시(五言詩)나 칠언시(七言詩)가 구절마다 자수(字數)가 동일한 반면, 한 편의 시에서 자수가 많은 구절과 적은 구절을 섞어서 지은 시이다. 중국 고전 운문(韻文)의 한 양식(樣式)으로, 민간 가곡에서 발달하여 당나라 이후 송나라에서 크게 성행하였다. 일정한 평측(平仄)으로 장단구(長短句)를 만들고 각 구(句)에 적당한 문자를 채워 넣어 짓는 시로, 당나라 이백(李白)의 《억진아(憶秦娥)》,..

四溟大師에 대한 칭송시(稱頌詩)3

莫道廟堂三老在 막도묘당삼로재 묘당에 삼로(三老)가 있다 말하지 말라 安危都付一僧歸 안위도부일승귀 국가의 안위(安危)는 한 중에 달려있다. 이 시구(詩句)는 일월록(日月錄)에 있는 것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수록한 것이라 하는데, 지은이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당시뿐만 아니라 임진란 이후 유림 간에 회자되던 시구(詩句)인 듯하다. 이 한 시구만 보더라도 당시 사명대사의 명망이 얼마나 떨치고 있었는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금까지 소개하고 또 오늘 소개할 당시 명사들의 사명대사 칭송시는 모두 사명대사(四溟大師)의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에 수록되어 있는데, 어느 시이거나 대략 그 뜻은 당시 현해탄만 건너면 돌아오지 못할 줄만 알고, 또 중[僧]을 보내기는 싫어도 위태로운 길을 갈 사람이 없으므로 부..

四溟大師에 대한 칭송시(稱頌詩)2

전편에 이어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일본에 갈 때 사명대사에게 써준 당대 세도가 또는 명망가들의 시를 살펴보면, 한 결 같이 조정의 대신이나 장수들이 하지 못할 일을 사명대사는 일신의 안위를 무릅쓰고 오로지 나라의 안위만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정 대신들은 자신들이 하지 못할 일을 사명대사가 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사명대사의 인품과 능력을 믿는 간절한 마음, 사명대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6) 이안눌(李安訥, 1571년~ 1637년) -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선조 기해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인조 11년에 예문관 제학을 지내고,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남한 성에 호종했다. 죽은 후에 청백리(淸白吏)에 선록(選 錄)되었다. 시호를 문혜(文惠)이다...

四溟大師에 대한 칭송시(稱頌詩)1

이번에는 당시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인품에 대하여 조정을 비롯하여 대소 관원들과 여러 계층에서 어떻게 평하였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일본으로 도해하라는 선조의 분부를 받들고 수개월 동안 서울에 체재하고 있던 사명대사는 서울의 학사대부(學士大夫)들에게 일본에 보내는 소감을 물었다. 서울의 재상 여러분께 도해시를 삼가 청합니다 (謹奉洛中諸大帝乞渡海詩: 근봉락중제대제걸도해시) 라는 시를 써서 돌렸는데 이때 지은 시가 많이 있었다 하나 그 일부만이 지금 전해지고 있는데 이러한 시에서 표현되어 있는 말을 음미함으로써 당시 여러 계층에서 사명대사를 어떻게 평하고 있었는가를 상고해 보고자 한다. (1) 이항복(李恒福: 1556년~1618년) -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 영의정을 지냈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