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시(季節詩)감상

소만(小滿)과 보릿고개

-수헌- 2021. 5. 19. 13:11

소만(小滿)

5월 21일은 24절기 중 소만(小滿)이다. 소만은 시기적으로 초여름에 해당하며 보리가 익어 보리타작을 할 시기이다. 요즘은 이미 전설이 되어 버렸지만 예부터 보리가 익어 가는 시기는 춘궁기(春窮期)보릿고개를 넘어야 할 시기였다. 따라서 옛 시인들도 보릿고개의 어려움을 노래한 시인도 있고, 힘든 노동인 보리타작을 수확의 기쁨으로 승화시킨 노래도 있다. 소만을 맞아 이와 관련된 시 몇 수를 감상한다.

 

田家 전가    辛永禧 신영희

농부의 집

 

打麥聲高酒滿盆 타맥성고주만분

보리타작 소리 높고 동이에 술 가득해도

老人無事臥荒村 노인무사와황촌

노인은 할 일 없어 빈 마을에 누워 있네

呼兒室下遮風慢 호아실하차풍만

아이 불러 집 아래 바람막이 치게 한건

恐擾新移紫竹根 공우신이자죽근

옮겨 심은 자죽뿌리 흔들릴까 두려워서네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농부들이 보리타작을 하면서, 힘들어도 한 사발씩 들이켜는 막걸리에서 수확의 즐거움이 묻어난다. 농번기 일손이 턱없이 부족할 텐데, 노인은 빈 마을에 일없이 누워있다. 이 노인은 아마도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해 보리타작도 못했을 것이다. 노인이 방 아래에 바람막이를 치도록 하는 것은 보리타작을 못하는 그가 얼마 전에 옮겨 심은 자죽(紫竹) 뿌리가 흔들려서 제대로 착근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서라는 이유를 내세워 자위하는 것 같다.

 

辛永禧(신영희)의 자는 德優(덕우) 호는 安亭(안정)이다. 조선 전기 『사우언행록』, 『안정실기』 등을 저술한 학자.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그 뒤 사림으로 자처하며 직산(稷山)에 은둔, 죽림의 학자들과 벗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刈麥謠 예맥요 (田家行;전가행) 蓀谷 李達 손곡 이달

보리 베는 노래

 

田家少婦無夜食 전가소부무야식

시골집 젊은 아낙 저녁거리가 없어서

雨中刈麥林中歸 우중예맥림중귀

빗속에 보리 베어 숲 속으로 돌아오니

生薪帶濕煙不起 생신대습연불기

생나무는 습기 먹어 불길도 일지 않고

入門兒女啼牽衣 입문아녀제견의

문에 들어오는 어린 딸은 옷 잡고 우는구나

 

이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유명한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작품이다. 이달의 제자인 허균(許筠)은 이 작품을 평하기를 '먹을 것이 없어 괴로워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그렸다'라고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에 먹을거리는 없고, 젊은 아낙은 별 수 없이 빗속에 들로 나가 보리를 베어 돌아와 자식들에게 보리밥이라도 지어줘야 하는데, 땔나무는 습기를 먹어서 불이 잘 붙지 않고, 게다가 어린 딸은 어머니 옷을 잡고 울기까지 한다. 비와 습기에 젖은 땔나무 등의 소재도 처량함을 표현하며, 측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또 보리를 베어 왜 숲 속으로 돌아왔을까? (혹시 남의 밭에서 몰래 보리를 벤 것은 아닐까?)

먹을 것 없는 살림살이에 이른 보리 이삭이라도 잘라서 끓여 먹으려는 젊은 아낙과, 굶주림에 지친 딸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보릿고개를 넘고 있는 가난한 농가의 풍경 한 폭을 가슴 아프게 포착하고 있다.

 

田家 전가    孤竹 崔慶昌 고죽 최경창

농부의 집.

 

田家無宿糧 전가무숙량

농부의 집엔 묵은 양식이 없어

日日摘新麥 일일적신맥

매일매일 햇보리를 따오네

摘多麥已盡 적다맥이진

하도 따니 보리는 이미 없어졌는데

東隣猶未穫 동린유미확

이웃은 오히려 거두지를 못하네

 

이 시는 앞에 소개한 손곡 이달과 같이 삼당시인으로 불리며 활동한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시이다. 손곡과 마찬가지로 보릿고개를 넘기기 어려운 농가의 고통을 표현했다.

 

夏夕 하석     李沂 이기

여름날 저녁

 

夏夕亦時凉   하석역시량

여름도 저녁이면 때로는 서늘한데

窓間野風入   창간야풍입

창문 틈으로 바깥바람 스며드네

田家無宿粮   전가무숙량

가난한 농가에는 묵은 양식 떨어져

杵臼夜來急   저구야래급

밤 되자 풋바심 절구질이 바쁘네

 

李沂(이기:1848~1909); 호는 해학(海鶴). 조선말 실학자이자 항일 독립투사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1968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 되었다.

 

보릿고개에는 굶어서 배가 고프면 여름이라도 추운 법인데, 창문 틈으로 찬바람까지 들어오니 더욱 궁상맞다. 작년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다 떨어져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덜 익은 보리를 베어다 절구질을 하고 있다. 이 시절에는 보릿고개를 못 버티고 굶어 죽는 餓死者(아사자)가 수없이 많았다.

풋바심이란 곡식이 익기 전에 베어 양식을 마련하는 일을 일컫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그냥 바심이라고도 한다.

 

麥田 맥전    楊萬里 양만리

보리밭

 

無邊綠錦織雲機 무변록금직운기

끝없는 초록비단 구름베틀로 짜서

全幅靑羅作地衣 전폭청라작지의

청라 전폭으로 땅의 옷을 만들었네

個是農家眞富貴 개시농가진부귀

이것이 농가의 진정한 부귀이니

雪花銷盡麥苗肥 설화소진맥묘비

눈꽃이 다 녹자 보리 싹이 살찌네

 

양만리(楊萬里:1127~1206)는 중국 남송시대의 시인으로 자는 정수(廷秀) 호는 성재(誠齋)이다. 육유(陸游) 범성대(范成大) 우무(尤袤)와 함께  '남송4대가(南宋四大家)'라고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다작 시인으로 유명한 그는 평생 동안 2만 수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는 월계(月桂)라는 시에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시구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보리는 겨울을 견뎌내는 식물인데 이 시에서 시인은 푸른 보리밭을 초록 비단(綠錦)과 푸른 비단(靑羅)으로 비유했고, 그런 비단을 짜는 베틀을 구름 베틀인 운기(雲機)라고 표현했다. 겨울을 견디고 보리 싹이 푸르게 땅을 덮으면 이제 보릿고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희망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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