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스페인에서 만난 서예작품-蘭亭序

-수헌- 2021. 1. 10. 14:27

2년 전 스페인을 여행할 때 바르셀로나 인근에서 식당에 들렸을 때 식당 벽면에 걸려 있는 대형 서예작품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식당은 테이블 수만 어림잡아 백여 개에 달하는 대형 뷔페식당으로 기억하는데 스페인에 한문 서예작품이 걸려있는 게 신기했었다. 그 작품들은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 모택동이 쓴 심원춘 설(沁園春 雪), 소동파의 시 적벽회고(赤壁懷古)의 세 가지였는데, 식당 주인이 중국계인지 아니면 중국 여행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걸어놓은 것인지는 모르나 서예와 한시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머나먼 서역 스페인에서 내가 아는 서예작품들을 만난 게 신기해서 사진을 찍어 왔는데 그간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나서 그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난정서는 서예계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왕희지(王羲之;307~365)의 작품이다.

난정서는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힌다. 353년 3월 3일에 지금의 중국 절강성 소흥현인 회계현(會稽縣)의 산음(山陰)에 난정(蘭亭)을 짓고 '왕휘지(王徽之), 왕헌지(王獻之) 등 자신의 아들 7명도 포함해 당시 동진의 사족(士族)과 명사들 41명을 초청해 계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이날 제를 올리고 술잔이 물에 떠내려 돌아가는 동안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로 술을 마시는 유상곡수(流觴曲水) 연회를 펼쳤다. 당시 왕희지, 사안 등 26명은 시를 지었고, 나머지는 벌주를 마셨다. 이 때 지었던 시 36수를 모아 책자를 만들고 왕희지가 서문(序文)을 썼는데, 이것이 바로 '난정서(蘭亭序)'이다. 지금까지도 최고의 서예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당시 왕희지는 술이 취한 상태에서 잠견지(蠶繭紙: 누에고치 껍질로 만든 종이)에 서수필(鼠須筆: 쥐 수염으로 만든 붓)로 28행 324자를 써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글씨 중에는 특히 갈지(之) 자가 가장 많아 24자나 들어가 있는데, 자획에 변화를 줘 한 글자도 똑같이 쓴 것이 없었다. 왕희지는 술이 깬 후 수 십 번을 다시 써보았으나 이에 미치지 못하자 스스로 '신의 도움을 받았다'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후일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본인도 서예를 좋아하고 붓글씨를 잘 썼는데, 왕희지의 작품을 각별히 좋아해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난정서' 진본(眞本)을 손에 넣었다.

태종은 풍승소(馮承素), 조모(趙模) 등 당시 뛰어난 서예가들을 시켜 임모본(臨模本)을 만들게 하고, 이 중 풍승소의 임모본이 가장 원본에 가까워 이를 고관대작들에게 나눠주게 했다. 난정서 원본은 그 후 당태종이 죽을 때 난정서를 가져가고 싶다고 유언함에 따라 이 진품은 그의 무덤인 소릉에 부장품으로 묻히게 되었다.

 

지금 전하는 난정서는 당태종이 확보한 것을 보고 베껴 쓴 풍승소의 임모본(당나라 중종 연호인 '신룡(神龍)' 도장이 찍혀 있어 신룡본이라 함.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을 비롯해 당대 최고의 서예가인 저수량(褚遂良), 구양순(歐陽詢), 우세남(虞世南) 등의 임모본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인근 식당에서 촬영한 난정서 액자 사진,유리로 덮힌 관계로 빛이 반사되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