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시(季節詩)감상/사시사(四時詞)

和閨秀許氏四時詞(화규수허씨사시사) - 申欽(신흠)

-수헌- 2022. 10. 31. 15:49

이 시는 상촌(象村) 신흠(申欽)허난설헌(許蘭雪軒)의 사시사(四時詞)를 보고 그 운(韻)을 그대로 차운하여 지은 시이다. 허난설헌의 사시사는 그녀의 불행한 결혼생활과 친정에 닥친 화 등으로 평생을 불우하게 살아온 심정을 섬세한 필치와 감성으로 사계절의 풍치에 비유하여 잘 묘사하였는데,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그녀의 운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허난설헌의 심정을 대변하여 오히려 더 잘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閨秀許氏四時詞 行於世 余見而和之 규수허씨사시사 행어세 여견이화지      申欽 신흠

규수 허씨의 사시사가 세상에 유행하므로 내가 보고 거기에 화답하다

 

春 봄

西樓昨夜經微雨 서루작야경미우

어젯밤 서쪽 누각에 적은 비가 지나가니

宿露滴滴滋蘭塢 숙로적적자란오

둑의 난초에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있네

緗簾鉤盡十二重 상렴구진십이중

담황색 주렴 열두 겹을 모두 걷어올리니

檻外煙絲嚲萬縷 함외연사타만루

난간밖엔 수많은 버들가지가 휘늘어졌네

幽情無賴理梳粧 유정무뢰리소장

머리 빗고 단장해도 유정이 의지할 곳 없어

小池羨殺雙飛央 소지선살쌍비앙

작은 못에 쌍쌍이 나는 원앙을 부러워하네

玫瑰作柱鈿箜篌 매괴작주전공후

옥으로 거문고 만들고 비녀를 공후 삼으니

曲裏一一鳴鸞鳳 곡리일일명란봉

곡조 속에 하나하나 난새 봉새가 우는구나

却憶當時腸斷處 각억당시장단처

당시에 애가 끊어진 일을 문득 생각하니

殘紅斂翠愁誰語 잔홍렴취수수어

지는 꽃 시든 청춘의 시름 뉘에게 말할까

瓊筵寥落錦屛空 경연요락금병공

옥 자리가 적막하니 비단 병풍도 부질없어

水榭漫記輕鴻舞 수사만기경홍무

수사에서 춤추던 기러기 가벼이 기억하네

流鸎如怨又如歌 류앵여원우여가

꾀꼬리 소리는 원망도 같고 노래도 같은데

獸爐香歇圍纖羅 수로향헐위섬라

향로에 향기 끊기고 비단 휘장만 둘려있네

傷心復送春歸去 상심부송춘귀거

다시 가는 봄을 보내며 마음만 상하는데

燕泥不禁花落多 연니불금화락다

제비는 집을 짓고 떨어지는 꽃 막을 수없네

 

※煙絲(연사) : 가느다란 버들가지를 연기와 실에다 비유함.

※幽情(유정) : 마음속 깊이 간직한 정.

※箜篌(공후) : 고대의 중국, 한국, 일본에서 쓰이던 현악기의 하나.

※水榭(수사) : 물가에 지은 정자.

 

夏 여름

殘英褪暈臙脂薄 잔영퇴훈연지박

남은 꽃잎도 지고 둥근 연지도 엷게 바래는데

煙絲嫋娜迷金閣 연사뇨나미금각

아리땁게 휘늘어진 버들가지 금각을 미혹하네

輕雲釀出梅子雨 경운양출매자우

가벼운 구름이 매자우를 빚어서 내어 보내니

一霎暗灑芙蓉幕 일삽암쇄부용막

한 줄기 빗소리가 부용막에 어둡게 뿌리네

文機繡倦石竹花 문기수권석죽화

비단 베틀에서 석죽화를 수놓다가 쉬면서

貪看簾前燕影斜 탐간렴전연영사

주렴 앞에 비낀 제비 그림자를 즐겨 보네

氷瓜乍劈碧椀冷 빙과사벽벽완랭

푸른 주발에서 식힌 차가운 오이를 잘라서

蜜脾欲滿黃蜂衙 밀비욕만황봉아

누런 벌집의 벌꿀을 가득 채우고 싶구나

閑愁交處翠眉重 한수교처취미중

한가한 시름 뒤섞이니 푸른 눈썹 무거워

故遣畫扇盤彩鳳 고견화선반채봉

짐짓 쟁반과 부채에 고운 봉새를 그렸네

蓬山知隔幾萬里 봉산지격기만리

봉래산이 몇 만 리나 떨어졌음을 아는데

象床驚破遊仙夢 상상경파유선몽

상상에서 선경에 노는 꿈 놀라 깨는구나

西陵消息北來舟 서릉소식북래주

북에서 온 배에 서릉 소식이 전해오니

去歲怨別江上頭 거세원별강상두

지난해 강 머리의 이별이 원망스럽구나

寄語南湖採蓮女 기어남호채련녀

남호에서 연 캐는 여인에게 말 전하노니

愼勿打起雙棲鷗 신물타기쌍서구

짝지어 사는 갈매기 두드려 깨우지 마오

 

※梅子雨(매자우) : 매실(梅實)이 익어 갈 무렵인 음력 4월경에 내리는 비를 말함.

※芙蓉幕(부용막) : 장수의 막부를 말함.

 

秋 가을

遲遲蓮漏夜初永 지지련루야초영

밤 길어지기 시작하니 물시계도 더디 가고

凄凄蕙逕霜華冷 처처혜경상화랭

쓸쓸한 혜초 길에 서리꽃이 차갑게 피었네

輕寒乍逼六銖衣 경한사핍륙수의

가벼운 추위가 갑자기 육수의에 스며들고

井欄蕭颯梧桐影 정란소삽오동영

우물 난간 오동나무에 가을바람 쓸쓸하네

西樓窸窣五更風 서루실솔오경풍

새벽바람 소리 서쪽 누각에서 바스락대니

爇盡蘭缸聞百虫 설진란항문백충

등잔불 다 타도록 온갖 벌레 소리 듣는구나

閑愁祗是成怊悵 한수지시성초창

부질없는 시름이 마침내 슬픔으로 변하니

翠被生憎一半空 취피생증일반공

독수공방 푸른 이불에 증오가 생기는구나

社日纔回燕如客 사일재회연여객

사일이 오자마자 제비는 나그네처럼 떠나고

重重羅幕圍椒壁 중중라막위초벽

초벽에는 비단 휘장을 겹겹이 둘러쳤네

班騅何處望陸郞 반추하처망륙랑

얼룩말을 탄 육랑을 기다리는 어느 곳에도

寶盖香車迷紫陌 보개향차미자맥

일산 덮인 좋은 수레만 거리를 헤매는구나

南鴻那得到龍庭 남홍나득도룡정

남쪽 기러기 어떻게 용정을 갈 수 있는지

玉宇㵳泬瞻雙星 옥우료혈첨쌍성

넓고 맑은 하늘의 견우직녀만 쳐다보네

低頭暗擲金錢卜 저두암척금전복

머리 숙이고 은밀히 금전 던져 점을 쳐보니

水沈香斷芙蓉屛 수침향단부용병

수침향의 연기가 부용 병풍에 끊어지네

 

※六銖衣(륙수의) : 불가어(佛家語)로 매우 가벼운 옷을 일컫는 말. 도리천의(忉利天衣)는 무게가 육수(六銖)이고, 염마천의(炎摩天衣)는 무게가 삼수(三銖)이고, 도솔천의(兜率天衣)는 무게가 이수(二銖)이고, 화락천의(化樂天衣)는 무게가 일수(一銖)이고, 타화자재천의(他化自在天衣)는 무게가 반수(半銖)라고 한다. 수(銖)는 무게의 단위로 한 냥의 1/24이며, 아주 근소한 량을 의미한다.

※蕭颯(소삽) : 바람이 차고 쓸쓸하다.

※窸窣(실솔) : 바람소리가 바스락 대다.

※蘭缸(난항) : 등불을 가리킨다. 등잔에서 타는 심지를 항아리와 난초에 비유한 듯하다. 당나라 시인 시견오(施肩吾)는 야연사(夜宴詞)에서 ‘등불이 낮 같아서 새벽까지 잠 못 들고 밤중에 일어나 옥당에서 향을 사르네.[蘭缸如晝曉不眠 玉堂夜起沉香烟]’라고 하였다.

※社日(사일) : 입춘(立春) 또는 입추(立秋) 후 다섯 번째의 무일(戊日)을 말한다. 특히 입추(立秋) 후의 사일을 추사(秋社)라 하며, 추사에는 제비가 둥지를 떠난다고 한다.

※椒壁(초벽) : 산초나 초피나무의 열매들을 흙에 섞어 바른 벽. 산초나 초피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기에 주술적으로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班騅何處望陸郞(반추하처망육랑) : 고악부(古樂府) 신현가(神弦歌) 명하동곡(明下童曲)에 ‘육랑은 얼룩말을 타고 … 문을 바라보고도 돌아오지 않는다 [陸郞乘斑騅 … 望門不欲歸].’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紫陌(자맥) : 자맥홍진(紫陌紅塵)의 준말로 도회지 주변의 도로로, 번잡한 속세를 말한다.

※龍庭(용정) : 본래 흉노(匈奴)의 선우(單于)가 천지의 귀신에게 제사 지냈던 장소로 오랑캐 땅을 뜻하는데, 북쪽 지방의 별칭이다.

※玉宇㵳泬瞻雙星(옥우료혈첨쌍성) : 옥우(玉宇)는 옥으로 장식한 궁전. 천제(天帝)가 있는 곳, 즉 하늘을 가리킨다. 쌍성(雙星)은 서로를 그리는 남녀, 견우직녀를 의미하는 듯하다.

 

冬 겨울

洞房寂寂漏方永 동방적적루방영

빈 방은 적적하고 밤 시간은 길기만 한데

博山裊裊煙初冷 박산뇨뇨연초랭

박산로의 가느다란 연기도 식기 시작하네

庭前密雪幾寸深 정전밀설기촌심

뜰 앞에 눈이 빽빽이 몇 치나 깊이 내려서

小梅枝亞渾無影 소매지아혼무영

작은 매화가지 눌러서 그림자도 전혀 없네

黃金杯瀉白玉甁 황금배사백옥병

황금 술잔에다 백옥병의 술을 따르면서

繡襦披拂生微香 수유피불생미향

수놓은 저고리 떨치니 작은 향기 생기네

獸鑪熾炭暖似春 수로치탄난사춘

화로에 숯불 피우니 봄과 같이 따뜻하여

文機不怕凝新霜 문기불파응신상

내린 서리에 비단 베틀 얼까 두렵지 않네

幽情撩亂爲誰語 유정료란위수어

그윽한 정 어지러워짐을 누구에게 말할까

寶帶參差一半瘦 보대참차일반수

몸이 절반이나 야위어 보대도 맞지 않네

箜篌暗度阮郞歸 공후암도완랑귀

공후로 은밀하게 완랑귀를 헤아려보니

懊惱柔腸如中酒 오뇌유장여중주

여린 마음에 오뇌가 술 취한 것 같구나

芳心翻恨意中人 방심번한의중인

꽃다운 마음 도리어 맘속의 임 원망해도

離夢豈到交河濱 이몽기도교하빈

어찌 교하 가에 이르러 이별을 꿈꾸는가

重門深閉日又昏 중문심폐일우혼

겹 문은 깊이 닫히고 날도 어두워졌는데

淚痕濕盡紅羅巾 누흔습진홍라건

눈물 자욱이 붉은 비단 수건 다 적시는구나

 

※博山(박산) : 박산로(博山爐). 중국 산둥성에 있는 보산(博山)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동제(銅製) 향로(香爐). 축부(軸部)가 있으며 밑은 접시 모양이고 상부는 산형(山形)임.

※阮郞歸(완랑귀) : 송(宋) 나라 때 안기도(晏幾道)가 지은 악부가사(樂府歌詞)의 이름인데, 머나먼 타향에 기거하는 나그네의 통절한 고민(苦悶)과 유원(幽怨)의 심정을 담고 있다.

※柔腸(유장) : 부드러운 마음, 어진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