和歸去來辭 (화귀거래사) - 宋相琦 (송상기)
和歸去來辭 화귀거래사 宋相琦 송상기
귀거래사에 화운하다.
夢窩相公¹⁾ 首有和作 三淵疎齋芝村諸公²⁾ ³⁾ ⁴⁾ 並次其韻 夢窩又要余追和 余亦效嚬賦之 情見于詞 工拙不論也
몽와상공 수유화작 삼연소재지촌제공 병차기운 몽와우요여추화 여역효빈부지 정견우사 공졸불론야
몽와(夢窩) 상공이 먼저 화운하여 글을 짓자 삼연(三淵) 소재(疏齋) 지촌(芝村) 등 여러 공들도 모두 차운하였다. 몽와가 또 나에게 이어서 화운하기를 요청하기에 내가 흉내 내어 지었다. 글에 마음을 담았으니 잘 짓고 못 짓고는 따질 것이 못 된다.
歸去來兮
돌아가야지
欲歸未歸何時歸 욕귀미귀하시귀
가고 싶어도 못 가니 어느 때나 돌아갈까
嗟塵寰不可以久處 차진환불가이구처
아 티끌세상은 오래 머물 곳이 못되니
恒鬱鬱而自悲 항울울이자비
항상 답답하고 슬프기만 하네
昔余志之嘐嘐 석여지지교교
옛날의 내 뜻은 크고 당당했지만
慨古人之難追 개고인지난추
옛사람을 따를 수가 없어 슬프구나
地幸同於洛閩⁵⁾ 지행동어락민
사는 곳이 다행히 낙민과 같아서
免趨向之或非 면추향지혹비
잘못된 곳을 향해 가는 것은 면했네
朝陪席於堤上⁶⁾ 조배석어제상
아침에는 소제에서 어른을 모셨고
夕春堂乎摳衣⁷⁾ 석춘당호구의
저녁에는 동춘당께 강론을 들었는데
終老大而無聞 종로대이무문
끝내 명성을 얻지 못하고 늙어버렸으니
奈質薄而才微 내질박이재미
자질이 천박하고 재주 없음을 어이할까
顧我素性 고아소성
돌아보건대 나의 본성은
厭世馳奔 염세치분
세상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였지
幽居境僻 유거경벽
외진 곳에서 조용히 숨어 지내니
水繞山門 수요산문
물이 산문을 감싸고 있고
令節佳辰 영절가진
좋은 계절 아름다운 시절에는
勝事長存 승사장존
즐거운 일만 길이 있었네
湖亭漁釣 호정어조
호숫가 정자에서 낚시질하고
月堂琴樽 월당금준
달 비친 집에서 거문고와 술을 즐겼지
奉至樂於晨昏⁸⁾ 봉지악어신혼
아침저녁으로 부모 봉양을 낙으로 삼아
期百年而承顔⁹⁾ 기백년이승안
백 년이 되도록 찾아뵙기를 기약했는데
泣風樹而苟延¹⁰⁾ 읍풍수이구연
어버이 여의고 울며 구차히 연명하며
戀舊巢而自安 연구소이자안
옛집 그리면서 스스로 편안히 여겼네
蒙先王之我嘉 몽선왕지아가
나를 가상히 여기는 선왕의 은덕을 입어
除旨翩於林關 제지편어림관
벼슬 내리는 교지가 산림까지 날아와서
策疲駑而趨命 책피노이추명
어명에 노둔한 말을 몰아 달려가니
媿高人之傍觀 괴고인지방관
고사가 곁에서 바라보아 부끄러웠네
遂低徊於鴻恩 수저회어홍은
큰 은혜 아래 지내다가 마침내
遲十載之南還 지십재지남환
십 년이 지난 뒤에야 고향으로 돌아오니
痛烏號其曷及 통오호기갈급
탄식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무슨 소용이랴
空白首而盤桓 공백수이반환
부질없이 백발이 되어 서성이는구나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가야지
思駕言而出游 사가언이출유
수레 몰고 나가 놀 것을 생각하니
旣菟裘之我有¹¹⁾ 기도구지아유
내게는 이미 은둔할 곳이 있는데
捨初服而何求¹²⁾ 사초복이하구
초복을 버리고 무엇을 구하려는가
縱江湖之退處 종강호지퇴처
비록 강호로 물러나더라도
詎宗國之忘憂 거종국지망우
어찌 나라 걱정을 잊을 수 있을까
秋風又攪余鄕思 추풍우교여향사
가을바람에 또 고향 생각을 하니
紛萬寶之盈疇¹³⁾ 분만보지영주
온갖 곡식이 들판 가득 넘실대는구나
登山有屐 등산유극
산에 오를 때 신는 나막신 있고
泛湖有舟 범호유주
호수에 띄울 배도 있네
掇寒花於東籬¹⁴⁾ 철한화어동리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꺾고
蔭佳木於崇丘 음가목어숭구
높은 언덕에 좋은 나무 우거졌어도
愍世路之懷襄¹⁵⁾ 민세로지회양
어지러운 세상을 걱정하는데
涇渭坼而橫流¹⁶⁾ 경위탁이횡류
경수와 위수 터져서 멋대로 흐르는구나
聊逍遙乎晚節 료소요호만절
늘그막에 여유롭게 놀고 즐기면서도
庶不忝於先休 서불첨어선휴
훌륭한 선대의 명성 더럽히지 말아야지
已矣乎 이의호
그만두어야지
衰榮自古無定在 쇠영자고무정재
영고성쇠는 예로부터 정해진 게 없는데
負二宜去吾奚留¹⁷⁾ 부이의거오해류
떠나야 할 이유를 짊어지고 어찌 머물며
胡爲乎蹙蹙靡所之 호위호축축미소지
무엇 때문에 쓰러져서 움츠리고 있을까
軒裳爲桎梏¹⁸⁾ 헌상위질곡
수레와 관복은 질곡일 뿐인데
風月是襟期 풍월시금기
바람과 달만을 마음속에 기약하였네
引泉石以枕潄¹⁹ 인천석이침수
샘물과 돌로 베개 삼고 양치질하며
滋蕙蘭而耘耔²⁰⁾ 자혜란이운자
혜초와 난초 기르며 농사를 지으리라
玩消長於羲爻²¹⁾ 완소장어희효
복희씨의 괘효에서 흥망을 살피고
詠薖軸於風詩²²⁾ 영과축어풍시
국풍의 과축을 노래해야지
彼詹尹兮何卜²³⁾ 피첨윤혜하복
저 첨윤이 무엇을 점쳤든 간에
吾志已決不須疑 오지이결불수의
내 뜻이 정해졌으니 의심할 것이 없구나
<竊觀諸作 盖亦各言其志耳 若余者 眞是可歸而不歸者也 自謀猶不及 其可爲他人謀 其歸不歸之當否乎 以此篇內 只述己事 而不敢如疎 芝兩公之言也 因記昔年癸丑 先人偶有和陶辭一篇 尤菴先生跋之曰 宗人宋某 爲示所和歸去來 其辭致之高古 某亦自知其不能與 之上下矣 惟日乾夕惕之句 是淵明道不到者 而又淵明所不屑者 只五斗米也 其視某之玉堂天曹 還可爭優劣於其間耶 抑使淵明生於某之後 則其將撫孤松而和此辭耶 殆難與俗人言也 噫 先生發揮之意 可謂盛矣 三復諷詠 尙有遺芬百世之下 其有不感歎於斯者乎 此文見刪於先生集中 恐遂湮沒無傳 仍並附見於此
가만히 제공들의 작품을 보니 대개 또한 각자의 뜻을 말하였다. 나는 참으로 돌아갈 수 있으나 돌아가지 않은 사람이다. 자신의 귀거래 계획도 마련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돌아가고 돌아가지 않는 것에 대해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문장 안에서 다만 나의 일을 서술했을 뿐이고, 감히 소재와 지촌 두 분처럼 말하지는 못하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옛날 계축년에 아버지[송규렴(宋奎濂)]께서 우연히 도잠(陶潛)의 귀거래사에 화답한 글 한 편을 지으셨는데, 우암(尤庵) 선생이 다음과 같이 발문을 하였다.
‘종인 송모(宋某)가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를 내게 보여 주었다. 그 말의 정치(情致)가 높고 예스러움은 송모 스스로도 도연명과 상하를 따질 수 없음을 잘 알 것이다. 오직 ‘종일 조심하고 저녁까지 두려워한다.’는 구절은 도연명도 말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도연명이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은 오두미의 녹을 받는 현령(縣令) 정도의 직위였다. 송모가 홍문관과 이조 같은 요직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공모와 비교해 본다면, 어찌 그 두 사람 사이에 우열을 따질 것이 있겠는가. 만약 도연명이 송모의 뒤에 태어났다면,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이 글에 화답했을까. 참으로 속인과는 말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아, 선생께서 말씀하신 뜻이 성대하다고 하겠다. 세 번 반복하여 읊조림에 지금도 향기가 남아 있으니, 백세가 지난 들 이 말에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이 글이 선생의 문집에 빠졌으니 마침내 사라져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워 여기에 함께 부록한다.>
※夢窩(몽와)¹⁾ : 조선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김창집(金昌集,1648~1722)의 호이다. 자는 여성(汝成),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三淵(삼연)²⁾ : 조선후기 삼연집, 심양일기 등을 저술한 학자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호이다. 자는 자익(子益),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위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의 아우이다 .
※疏齋(소재)³⁾ : 조선후기 홍문관정자, 병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이명(李頤命,1658~1722)의 호이다. 자는 양숙(養叔),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芝村(지촌)⁴⁾ : 조선후기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희조(李喜朝,1655~1724)의 호이다. 자는 동보(同甫),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洛閩(낙민)⁵⁾ : 낙민(洛閩)의 낙(洛)은 정자(程子)가 살았던 낙양(洛陽), 민(閩)은 주자(朱子)가 살았던 복건성(福建省)을 가리키는데, 전하여 정자와 주자의 학문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여기서는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같은 훌륭한 스승이 사는 지역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朝陪席於堤上(조배석어제상)⁶⁾ : 배석(陪席)은 지위가 높은 사람을 모시고 어떤 자리에 함께 참석함을 말하고, 제(堤)는 송시열이 살았던 마을 소제(小堤)를 말한다. 따라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에게 수학했다는 의미이다.
※夕春堂乎摳衣(석춘당호구의)⁷⁾ : 구의(摳衣)는 옷자락을 들어 올려서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이다. 후세에는 스승 앞에 나아가 강론을 듣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에게 강론을 들었다는 뜻이다.
※晨昏(신혼)⁸⁾ : 신혼(晨昏)은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나오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말한다. 부모를 위하여 저녁에는 이부자리를 펴 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피는 것을 말한다.
※承顔(승안)⁹⁾ : 웃어른을 찾아가 뵘.
※泣風樹而苟延(읍풍수이구연)¹⁰⁾ : 풍수(風樹)는 돌아가신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슬픔을 비유한 말이다. 주(周)나라 때 효자 고어(臯魚)가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멎지 않고, 자식은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菟裘(도구)¹¹⁾ : 노(魯) 나라의 고을 이름. 춘추시대 노 은공(魯隱公)이 은거했던 지명(地名)에서 나온 말로, 은거지(隱居地)를 가리킨다.
※初服(초복)¹²⁾ : 초복(初服)은 벼슬에 나아가기 전에 입던 옷을 말한다.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나아가서 들어가지 못하고 허물만 입었으니, 물러나 나의 초복을 다시 손질하리라. 연잎과 마름으로 저고리를 만들고, 부용을 모아서 치마를 만드리라.〔進不入以離尤兮 退將復修吾初服 製芰荷以爲衣兮 集芙蓉以爲裳〕’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萬寶(만보)¹³⁾ : 만보(萬寶)’는 각종 작물의 열매를 말한다.
※掇寒花於東籬(철한화어동리)¹⁴⁾ : 도잠(陶潛)의 시 음주(飮酒)에 ‘동쪽 울 아래에서 국화꽃을 따다가, 유연히 남산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도잠처럼 은둔하며 살고자 하는 소망을 담았다.
※회양(懷襄)¹⁵⁾ : 회양(懷襄)은 서경(書經)에 나오는 ‘홍수가 하늘에 치솟아서 넓고 넓게 산을 품고 언덕을 능가하였다. [洪水滔天 浩浩懷山襄陵]’는 회산양릉(懷山襄陵)에서 온 말인데, 홍수에 잠기는 재해를 뜻한다.
※涇渭(경위)¹⁶⁾ : 경위(涇渭)는 중국 섬서성(陜西省)에 있는 경수(涇水)와 위수(渭水)를 말한다. 경수는 탁하고 위수는 맑은데, 그 물이 섞였다는 것은 세상이 어지럽다는 의미이다.
※負二宜去吾奚留(부이의거오해류)¹⁷⁾ : 당 목종(唐穆宗)이 외직에 있던 공규(孔戣)를 이부시랑으로 불러들여 좌승(左丞)으로 임명하였으나, 공규(孔戣)는 나이가 많음과 낭관을 진퇴 시키지 못함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다. 그와 절친한 한유(韓愈)가 사직을 만류하자 ‘내가 떠나야 할 두 가지 마땅한 이유를 짊어졌는데, 어찌 그대의 말을 고려할 여지가 있겠소. [吾負二宜去 尙奚顧子言]’하며 끝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고사를 인용하였다.
※桎梏(질곡)¹⁸⁾ : 질곡(桎梏)은 옛날 형구(刑具)인 차꼬와 수갑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보통 몹시 속박하여 자유를 가질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태를 비유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引泉石以枕潄(인천석이침수)¹⁹ : 은거 생활을 뜻한다. 진(晉) 나라 손초(孫楚)가 숨어 살려고 하면서 ‘돌을 베고 물에 양치질하련다.〔枕石漱流〕’라고 말해야 할 것을, ‘물을 베고 돌로 양치질하련다.〔枕流漱石〕’라고 잘못 말하였다. 왕제(王濟)가 이 말을 듣고서 잘못을 지적하자, 손초가 ‘물을 베는 것은 속진(俗塵)에 찌든 귀를 씻어 내기 위함이요, 돌로 양치질하는 것은 연화(煙火)에 물든 치아의 때를 갈아서 없애려 함이다.’라고 대답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滋蕙蘭而耘耔(자혜란이운자)²⁰⁾ : 자혜란(滋蕙蘭)은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모함을 받고 쫓겨난 뒤에도 계속 인의(仁義)를 지키겠다는 뜻을 밝히며 ‘내가 이미 구원의 땅에 난초를 심어 놓고, 다시 백 묘의 땅에 혜초를 심었노라.〔余旣滋蘭之九畹兮, 又樹蕙之百畝.〕’라고 한 이소(離騷)의 구절을 변용한 것이다. 초야에 물러나 살겠다는 말이다.
※羲爻(희효)²¹⁾ : 희(羲)는 상고 시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한 명인 복희씨(伏羲氏)를 가리킨다. 복희씨가 주역(周易)의 팔괘(八卦)를 처음 고안했다고 한다.
※薖軸(과축)²²⁾ : 어진 사람이 초야에 은거하며 곤궁하게 살아감을 이르는 말. 시경(詩經) 고반(考槃)〉에 ‘고반이 언덕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考槃在阿, 碩人之薖.〕’라고 했고, 또 ‘고반이 높은 언덕에 있으니 석인이 한가로이 서성이도다.〔考槃在陸, 碩人之軸.〕’라고 하였다.
※詹尹(첨윤)²³⁾ : 옛적 점치던 사람의 이름이다.
*송상기(宋相琦,1657~1723) : 조선후기 홍문관저작, 충청도관찰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자는 옥여(玉汝), 호는 옥오재(玉吾齋).